룰라와 노동자당: 브라질 진보정치의 성공과 교훈
주세훈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는 21세기 브라질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2003년부터 2010년까지, 그리고 2023년부터 현재까지 브라질 대통령으로 재임하며 브라질의 사회, 경제적 지형을 크게 변화시다. 룰라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정치인의 성공담을 넘어, 그가 창당을 주도한 노동자당(Partido dos Trabalhadores, PT)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노동자당은 브라질의 군사독재 시절, 억압받던 노동자 계급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태동했고, 점진적으로 브라질을 대표하는 좌파 집권당으로 성장했다.
제1기 집권 (2003~2010): 저항에서 권력으로
룰라의 첫 집권은 노동자당이 군사독재 시절부터 쌓아온 저항 세력의 정치 세력화의 성공적인 결과였다. 룰라는 금속노조위원장으로서 노동운동을 이끌었고, 노동자당은 노동조합과 풀뿌리 운동을 기반으로 대중의 신뢰를 얻었다. 세 번의 낙선에도 굴하지 않고 대통령에 당선된 그의 이야기는 단기적 성과가 아닌 장기적 비전을 가진 진보정치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이 시기 룰라 정부는 '볼사 파밀리아'와 같은 복지 정책을 통해 민주주의 확장을 시도했다.’볼사 파밀리아’는 가족지원금을 주는 대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을 기본 약속으로 했다. 빈곤층에게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여 단순한 생존을 넘어 정치 참여의 기반을 마련해주었고, 이는 사회적 약자들이 민주주의의 주체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자본주의 극복을 위해 당장의 급진적인 사회주의를 택하기보다, 브라질 상황에 맞게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며 복지 확대를 동시에 추진하는 접근법을 선택했다. 브릭스(BRICS)와 같은 신흥 경제국과의 협력을 강화하여 미국 중심의 국제 질서에 균형을 맞추려 한 것 역시 글로벌 자본주의의 독점적 영향력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영광 뒤에 가려진 그림자: 과제와 교훈
룰라와 노동자당의 성공적인 역사에는 여러 한계와 그림자도 존재한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브라질의 에너지 국영기업 '페트로브라스(Petrobras) 부패 스캔들'이다. 페트로브라스가 정.재계 인사들에게 뇌물을 제공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노동자당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혔고, 룰라 자신도 수감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이는 아무리 이상적인 목표를 가진 정당이라도 권력 장악 이후 권력의 타락 가능성과 투명한 감시 시스템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제2기 재집권 (2023~현재): 위기 극복과 전략적 재도약
2023년 룰라의 재집권 과정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것을 넘어, 노동자당이 겪었던 위기를 극복하고 진보정당의 본질을 재확인하는 과정이었다.
1. 저항 세력의 재결집과 연합 전선 구축: 부패 스캔들과 룰라의 수감으로 인해 큰 위기를 겪었던 노동자당은 2022년 대선을 앞두고 저항 세력의 재결집에 나섰다. 보우소나루 정부의 권위주의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대의 아래, 노동자당은 다양한 정당과 시민 사회를 아우르는 '브라질의 희망' 연합을 구축했다. 특히 과거의 경쟁자였던 중도 우파 성향의 제라우두 아우키민을 부통령 후보로 영입함으로써 이념적 한계를 넘어선 전략적 연합을 이루어냈다.
2. 민주주의 확장과 불평등 해소의 재강조: 룰라 정부의 복귀는 민주주의 확장을 바라는 브라질 국민들의 열망과 맞닿아 있었다. 보우소나루 정부가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고 소수자들의 권리를 축소하려 했던 것과 달리, 룰라는 '볼사 파밀리아'의 확대와 같은 복지 공약을 통해 빈곤층과 소외 계층을 다시금 정치의 중심으로 끌어들이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민주주의의 참여 주체를 확장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실질적으로 완화하려는 노동자당의 근본적인 목표를 재강조한 것이다.
3.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실용적 개혁: 노동자당은 이번에도 급진적인 변화보다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점진적 변화를 택했다. 보우소나루 정부 시기의 경제적 불안정과 인플레이션에 대한 국민적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면서도 복지 지출을 확대하겠다는 정책을 제시했다. 또한, 환경 보호와 아마존 보존 정책을 통해 글로벌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개발 논리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며 지속 가능한 성장을 추구하는 진보정당의 의지를 드러냈다.
이처럼 룰라와 노동자당의 집권은 진보정당이 시대적 변화에 맞춰 본질적 가치를 어떻게 재해석하고 실현해 나가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1기 집권이 저항 세력의 성장을 보여주었다면, 2기 재집권은 위기를 극복하고 전략적 연합을 통해 민주주의의 가치를 수호하려는 노력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룰라와 노동자당(PT)의 사례는 한국의 진보정당에게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을 제시한다. 첫째,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강령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가 문제다라고 말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국민 삶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정책 등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브라질의 '볼사 파밀리아'처럼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면서도 빈부 격차를 해소하는 유연한 접근을 통해 다수 국민의 공감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민주주의 확장을 위해 소외된 계층을 단순히 대변하는 것을 넘어, 그들을 직접 정치 과정에 참여시켜 민주주의의 주체로 성장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볼사 파밀리아로 학교에 갈 수 있었던 아이들이 자라서 브라질 룰라 대통령의 2기 당선을 만든 동력이 된 것처럼 말이다. 셋째, 저항 세력의 정치 세력화를 위해 특정 지지층에 머무르지 않고, 시민사회와의 연대 및 중도층까지 아우를 수 있는 전략적인 연합을 구축해야 합니다. 이처럼 룰라와 노동자당의 경험은 한국의 진보정당이 현실에 뿌리내린 정책, 확장된 민주주의, 그리고 전략적 연합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