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정치의 지각변동: 캐서린 코놀리 당선이 주는 교훈

글:  주세훈


아일랜드 정치의 지각변동: 캐서린 코놀리 당선이 주는 교훈

2025 10 25일 치러진 아일랜드 대통령 선거는 단순한 국가 원수 교체를 넘어, 아일랜드 정치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뒤흔든 사건이었다. 아일랜드는 대통령이 국가의 상징적, 의례적 원수 역할을 맡고 실질적인 국정 운영은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담당하는 의원내각제 국가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 좌파 무소속 후보인 캐서린 코놀리(68) 63.36%라는 압도적인 1순위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지난 한 세기 동안 아일랜드를 지배해 온 중도-우파 기득권층(피너 게일(통일 아일랜드당) 및 피어너 팔(공화당) 연합)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무너졌음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아일랜드는 FDI(외국인 직접 투자)를 통해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솟는 임대료, 주택 위기, 생활비 상승 등 자본주의가 낳은 사회 경제적 불평등이 국민, 특히 젊은 세대에게 깊은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위기를 방치한 기득권 정당들은 국민적 분노의 직접적인 표적이 되었다. 특히 피어너 팔 후보 짐 개빈이 세입자에게 빚진 임대료를 환불하지 않은 스캔들로 중도 사퇴한 사건은 주택난이 극심한 시기에 기득권층의 위선을 폭로하는 상징적 사건이 되어 코놀리라는 아웃사이더에게 압승의 공간을 열어주었다.  

캐서린 코놀리, Photograph: Brian Lawless/PA, www.theguardian.com

캐서린 코놀리의 정치적 궤적: 분명한 좌파 정체성

새롭게 아일랜드의 제10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캐서린 코놀리는 기득권 질서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녀는 서부 골웨이의 서민 주택에서 14남매 중 한 명으로 성장했으며, 이러한 성장 배경은 그녀의 정치적 정체성을 규정하며, 평생을 '목소리 없는 이들을 위한 대변인' 역할에 헌신하게 했다. 임상 심리학 및 법률 학위를 소지한 변호사 출신인 코놀리는 1999년 노동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했으나 2007년에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활동했다. 2016년 하원 의원(무소속)에 당선된 후, 2020년에는 여성 최초로 하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녀의 정치적 성향은 명확한 급진적 좌파로 묘사되며, 선거 캠페인은 아일랜드 내의 주택난과 경제적 불평등 해소를 위한 '긴급한 국내 개혁' 요구에 집중되었고, 이는 젊은 유권자들의 폭발적인 공감을 얻었다.  

코놀리가 63%가 넘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좌파 정당들의 이례적이고 전략적인 대단결이었다. 코놀리는 선거 초기만 해도 일반 유권자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무소속 하원 의원에 불과했지만, 아일랜드 최대 야당인 신 페인당(Sinn Féin)이 자체 후보를 내지 않고 그녀를 지지하는 전략적 결단을 내렸다. 여기에 노동당, 사회민주당, 인민 우선-연대 등 다른 좌파 소수 정당들까지 연합하여 코놀리를 단일 좌파 후보로 지지했다. 이처럼 좌파는 분열로 패배한다라는 오랜 통념을 파괴하고 대중의 불만을 '기득권 심판'이라는 공동의 목표로 집중시킨 전략은, 아일랜드 정치의 지각변동을 일으킨 핵심 동력이 되었다.  

아일랜드 국민의 선택: 민주주의 확장과 반자본주의적 비전

코놀리의 당선은 아일랜드 국민들이 기존의 경제 성장 모델과 정치 시스템에 대해 근본적인 거부를 표명했음을 의미하며, 이는 자본주의 극복과 민주주의 확장에 대한 요구와 일치한다. 이번 선거에서 총 투표수의 12.9%에 달하는 213,738표가 무효표로 집계되었다. 이는 전례 없는 규모로, 유권자들이 두 주요 후보 중 어느 쪽에서도 대안을 찾지 못한 채 기성 정치 시스템에 대한 조직적이고 통계적인 거부 행위를 한 것으로 분석된다. 코놀리 당선자는 이러한 유권자의 소외와 단절을 직시하고, 헌법상 제한된 대통령직을 국민의 도덕적·상징적 권위를 대변하는 플랫폼으로 활용하여, 정부 정책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적 질문을 던지고 "필요할 때 목소리를 내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이는 정치적 소외를 극복하고 민주주의의 지평을 넓히려는 진보적 의지의 표현이었다.

국제적 의제에 있어서도 코놀리 당선자는 자본의 논리와 군사주의에 대해 명확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그녀는 아일랜드의 오랜 중립성 정책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NATO '호전적'이라고 비난했고, 아일랜드의 중립성을 '서방 군사주의' '대량 학살 방조'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은 아일랜드 정부가 FDI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국익을 희생하며 중립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비판적 분석과 궤를 같이하며, 국제 자본의 영향력에 맞서 주권을 지키는 반제국주의적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특히,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학살에 대한 그녀의 '비타협적인 비판'은 팔레스타인과의 역사적 연대 의식이 깊은 아일랜드 국민들의 정서를 결집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코놀리의 승리는 유럽 전반의 우파 포퓰리즘 득세 흐름과 상반되게 사회경제적 불만에 대한 해법이 사회적 평등과 국제적 연대에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캐서린 코놀리와 지지자들 Photograph: Alan Betson, www.irishtimes.com

아일랜드 정치의 변화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코놀리의 승리는 신 페인(좌파정당)을 중심으로 하는 좌파 연합에 엄청난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좌파 지도부는 이번 승리가 "다음 총선 이후 좌파연대를 위한 실질적인 전망"을 가져왔다고 분석했다. 대통령 선거에서의 성공적인 연대 모델은 차기 총선에서 좌파가 다수당이 되거나 연립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는 전략적 자신감을 심어주었으며, 이로써 코놀리의 7년 임기 동안 아일랜드 정치의 핵심 관찰 포인트는 좌파 연립 정부의 현실화 여부가 될 것이다. 다만, 코놀리의 급진적 성향으로 인해 그녀와 공화당 소속의 미할 마틴 총리가 이끄는 중도 우파 정부 간에 적지 않은 마찰이 발생할 것으로 전망되며, 그녀의 강경한 외교적 발언은 미국 및 유럽 동맹국들과의 관계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캐서린 코놀리의 당선은 한국의 진보정당에게 세 가지 핵심적인 메시지를 던져준다. 첫째, 전략적 연대의 필연성이다. 아일랜드 좌파는 이념적 차이를 넘어 '기득권 심판'이라는 공동의 목표와 '경제 정의'라는 대중적 의제를 중심으로 뭉쳤으며, 이는 분열된 한국 진보 진영이 선거에서의 승리라는 실질적인 목표를 위해 전략적 연대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함을 시사한다. 둘째, 자본주의 위기와의 정면 대결 의제 설정이다. 코놀리의 승리는 주택, 노동, 불평등 등 국민의 삶에 가장 첨예한 자본주의의 위기 지점을 정면으로 다룰 때, 대중의 분노가 강력한 투표의 동력으로 조직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우리 진보정당 역시 실제 경제 위기 의제를 중심에 두고 '집권 가능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셋째, 용기 있는 국제적 연대의 비전이다. 코놀리가 아일랜드의 중립성 수호와 반군사주의를 주장했듯이, 한국의 진보정당 역시 한반도의 평화와 제3세계와의 연대 등 더 넓은 범위의 국제적 의제에서 선명한 목소리를 낼 때, 기존 정당들과 차별화되며 국민적 지지 기반을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코놀리의 승리는 유럽에서 우파 포퓰리즘이 득세하는 흐름 속에서도 좌파적 해법이 여전히 대중적 선택이 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우리 진보 진영 역시 이 역사적 교훈을 바탕으로 '집권 가능한 진보'의 길을 만들어갈 전략과 용기를 갖춰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