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표재선
1933년 1월 10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히틀러를 총리로 지명했다. 메이데이 다음날 독일노동조합총연맹이 해산됐고,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차례로 불법화됐다. 두 세대 가까이 이어지며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평가받았던 독일 노동운동, 진보정당운동이 불과 몇 개월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모두가 알고 있듯이 히틀러는 권력을 장악한 후에 전쟁 준비에 돌입했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약 7,500만 명)를 낸 전쟁이 되었다.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한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경제위기가 지속되고 있고, 극우 정당이 부상하는 현상이 100년 전 유럽의 상황과 닮아있다. 고통받는 민중의 대안으로 진보정당이 자리 잡지 못했을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는지 성찰하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겠다.
세계 대공황과 나치당의 급부상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실업자가 600만 명에 육박하자, 독일 민중들은 온건한 사회민주당 대신 자극적이고 과격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나치당으로 눈을 돌렸다. 나치당은 반유대주의, 반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유대인 금융자본가들과 진보정당을 공격했다. 이 전략은 실업자, 노동자, 농민 등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나치당의 당원 수는 1925년 2만 5천 명에서 1929년 약 18만 명으로 증가했다. 이 시기에 나치당의 '가울라이터'(지역 지도자) 조직 체계가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928년 총선에서 불과 2.6%를 득표했던 나치당은 1930년 총선에서는 18.25%를 얻어 삽시간에 제2당이 됐다. 그리고 1932년 7월 총선에서 37.3%를 득표하며 사회민주당을 제치고 제1당이 되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카를 마르크스를 집어삼킨다.”는 구호 아래 사회민주당, 공산당의 거점인 베를린 공략에 나섰던 나치당 베를린 지부 책임자 요제프 괴벨스는 이렇게 말했다. “붉은 무리는 그들의 호기를 놓치고 말았다. 이제 그 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1933년 1월 나치당 대표 히틀러가 총리에 올랐다.
정권을 잡은 나치당은 경제 불황을 계획경제를 통해 해결하려고 했다. 당시 나치당이 추진한 국가 주도의 계획경제로,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 30% 이상이던 독일 내의 실업률이 급격히 감소했다. 1936년의 실질 국민 총생산은 나치 정권 이전의 최고였던 1928년을 15%나 상회했다. 현재 독일의 고속도로 아우토반 건설도 히틀러 시대에 진행됐다.
나치 독일은 노동자를 위한 정책으로 크루즈선을 타고 떠나는 해외여행, 스키와 요트 등의 스포츠, 국내도보여행, 고전음악 관람과 연극관람, 미술전시와 공장축제 등의 여가 프로그램을 노동자들에게 저렴하게 제공했다. 당시 국내외적으로 선전효과가 매우 컸던 선상 크루즈 여행을 비롯한 전체 여행 참가자의 숫자는 1934년 230만 명, 1935년 630만 명, 1937년 950만 명, 1938년 1천 30만 명에 달했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나치 독일 시대의 복지는 한계도 분명하게 존재했다. 나치당의 복지는, 자국민들의 지지를 결집해내기 위한, 그래서 독일인만을 위한 '갈라치기 복지정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회민주당의 분열
사회민주당은 1차 세계대전을 마치며 1918년 바이마르 공화국을 수립하고, 1933년까지 정권을 유지했다. 그런데 15년 만에 나치에게 권력을 빼앗긴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첫째, 진보정당의 본성을 잃었고 둘째, 그로 인해 당이 분열했기 때문이었다.
1914년 사회민주당 의원들이 전쟁예산안에 찬성 표결을 했을 때 카를 리프크네히트 의원 홀로 반대표를 던졌다.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스파르타쿠스 동맹’이라는 당내 분파를 만들어 반전 투쟁을 벌여갔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사회민주당 의원 중 반전 입장을 밝히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들 중 탈당한 18명의 의원들은 1917년 4월에 독립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
1918년 1월, 반전 투쟁은 드디어 100만 노동자가 참여한 총파업으로 폭발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그해 10월, 정부는 타협책을 제시했다. 정당내각제가 약속됐고, 각 주의회의 3계급 선거 폐지가 이뤄졌다. 사회민주당은 여기에서 집권의 길을 발견했다.
그러나 즉각적인 전쟁 중지를 요구하는 대중들은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신중함과 달랐다. 11월 3일 킬 군항의 해군 사병들은 출항 명령을 거부하고 노동자·병사 평의회를 건설했다. 혁명은 일주일 새 독일 전역의 도시들로 확산됐다. 11월 9일에는 베를린에서 노동자·병사 평의회가 건설됐다. 사회민주당 집행부도 더 이상 의회 안에서의 개혁만을 고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회민주당 3인, 독립사회민주당 3인으로 임시정부 격인 인민대표평의회가 구성됐다. 독일 혁명의 첫 단계가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사회민주당은 군대의 민주화 요구를 철저히 외면하고 기존 군 장성들의 기득권을 보장하는 비밀협상을 추진했다. 그리고 그 장성들과 함께, 평의회들을 해산시키고 독립사회민주당을 권력에서 배제할 방안을 공모했다. 분출하는 대중의 요구를 제압하기 위해 수구세력과 손을 잡고 그들에게 다시 권력을 부여한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회민주당은 ‘형제 살해’를 저질렀다. 1919년 1월 15일 사회민주당 간부 구스타프 노스케는 비밀부대를 풀어서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학살했다. 두 사람의 학살은 세계 사회주의운동을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진영으로 나누는 계기들 중 하나가 되었다.
역사의 교훈
카를과 로자가 살해된 지 나흘 뒤에 실시된 제헌의회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은 37.9%를 얻어 제1당이 됐다. 8월 11일에는 바이마르 헌법이 통과돼 민주공화국 체제가 자리 잡았다. 이후 중도파 독일 민주당이나 중도우파 가톨릭 중앙당과 바이마르 연정을 구성하여 다수의 총리를 배출하는 등 내각을 주도했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이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당원은 80만~100만 명 수준을 유지했지만, 고령화가 심각했다. 의원들 중 10%만이 40세 미만이었고, 1930년 기준 25세 이하 당원은 8%에 불과했다. 이는 의원의 60%가 40세 미만이었던 나치, 당원의 1/3이 20대였던 공산당과 뚜렷이 구별되는 것이었다.
사회민주당은 대공황의 여파에도 속수무책이었다. 1932년에는 전체 국민의 1/5인 600만 명이 실업자 상태였다. 독일 노동운동 안에서도 스웨덴같이 국가가 직접 나서서 고용을 창출하자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러한 혁신적 방안을 관철하자면, 재정확장 정책에 반대하는 우파세력과 단절하고 좌파 단독정부를 구성하는 결단이 필요했다. 하지만 사회민주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결과 히틀러 집권 후에 정당 해산을 당했고, 당 간부들은 체포를 피해 해외로 망명하거나 살해당했다.
제국주의 전쟁에 분명한 반대입장을 갖지 않은 것, 분출하는 민중들의 요구 앞에서도 권력 유지를 목적으로 수구세력과 손을 잡은 것,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동료를 배척하고 심지어 살해한 것, 고통받는 민중의 삶을 해결할 비전도 능력도 없었던 것 등 사회민주당이 진보정당으로서 본성을 잃어버린 결과는 참혹한 것이었다.
자본주의 극복과 민주주의 확장이라는 진보정당의 본성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이 극우 정당의 부활을 저지시키는 길임을 역사의 교훈으로 새겨야겠다.
<참고 도서> 세계진보정당운동사 (장석준 지음, 서해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