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타협'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이탈리아 공산당


글 : 주세훈

1970년대의 이탈리아는 거대한 위기 속에 있었다독일의 영화감독인 마르가레테 폰 트로타의 동명 영화에서 비롯된 용어로 '납의 시대(anni di piombo)'라 불리던 시기였다. 경제는 멈춰 섰고, 거리는 극좌, 극우테러, 무장충돌이 난무하던 사회적 갈등의 시기였다. 냉전으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극에 달한 시기로 사회는 마치 납에 짓눌린 것처럼 암울하고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역사상 가장 거대한 진보 정당 중 하나였던 이탈리아 공산당(PCI)은 중대한 기로에 섰다. 그 위기의 한복판에서, 당의 운명을 둘러싸고 두 명의 거인이 서로 다른 해법을 가지고 충돌했다. 한 명은 당 총서기 엔리코 베를링구에르였고, 다른 한 명은 그의 오랜 동지이자 반대자였던 조르조 아멘돌라였다.

정당의 위기와 두 혁신가의 등장

1970년대 이탈리아 공산당은 기묘한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공산당은 서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고,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냉전 시대의 반공적 정치 환경 속에서 공산당은 정권에서 영원히 배제되어 있었다.기존의 이념과 투쟁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국 국민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이 당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당의 지도자였던 베를링구에르는 파격적인 혁신 노선을 제시했다. 그의 비전은 '역사적 타협'이었다. 그는 당의 오랜 숙적이자 당시 집권당이었던 기독교민주당과 손을 잡고 국가적 위기를 함께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의 순수성을 일부 희생하더라도, 국가를 안정시키고 공산당을 합법적이고 책임 있는 집권 세력으로 만들겠다는 실용적인 혁신안이었다. 베를링구에르는 정치 조직의 생존을 위해 과거의 이념을 내려놓고, 당의 역할을 재정의하려 했다. 만년 2당을 넘어 책임있는 집권당으로 위치 지우고자 한 시도였다.

엔리코 베를링구에르, 출처 : 위키백과


그러나 그의 오랜 동지였던 아멘돌라는 다른 해법을 내놓았다. 아멘돌라가 생각한 혁신은 훨씬 더 근본적인 것이었다. 자국내에서 실용적 좌우연정을 주장한 베를링구에르의 주장을 넘어서 이탈리아 공산당의 이념을 바꾸고자 했다. 그는 공산당이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유럽의 주류 좌파 흐름에 합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노선은 당의 이념적 뿌리를 서유럽의 민주주의에 맞게 재정립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이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하고, 다른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를 수용하는 이념적 혁신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었다.

조르조 아멘돌라, 출처:위키백과

변화의 실패와 비극적 결말

베를링구에르와 아멘돌라의 갈등은 한 조직이 가진 '전략적 갱신(Strategic Renewal)'의 기회를 둘러싼 싸움이었다. 베를링구에르는 당의 총서기로서 자신의 노선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그는 하버드대 경영학 교수였던 존 코터가 제시한 ‘변화 관리 모델’에서 조직의 변화를 이끄는 팀을 의미하는 '변화 주도 연합'을 당내 주류파와 외부 세력(기독교민주당)을 통해 구축하려 했다. 그의 리더십 아래, 공산당은 선거에서 사상 최대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잠시나마 성공을 맛보는 듯 했다.

하지만 그의 실용적 혁신은 잃는 것이 많았다. 보수적인 기독교민주당과의 연정을 위해 긴축재정을 받아들이면서 노동개혁을 포기했고, 카톨릭 교회의 보수성에 맞서 투쟁하는 여성들의 투쟁에 눈감아야 했다.

아멘돌라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는 베를링구에르의 노선이 당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결국 당의 존재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 경고했다.


이들은 베를링구에르의 변화 관리 과정에서 가장 큰 '내부적 장애물'이었다. 베를링구에르는 이들의 반발을 완전히 잠재우지 못했고, 당내에는 깊은 균열이 남았다. 당원들은 두 가지 혁신 노선 사이에서 방황하며 혼란에 빠졌다.

결정적으로, 1978년 기독교민주당의 지도자 알도 모로가 극좌파에 납치되어 암살당하는 사건은 '역사적 타협' 노선에 치명타를 입혔다. 이 사건으로 베를링구에르는 더 이상 ‘역사적 타협’을 진전시키지 못했고, 당내 갈등은 수습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후 신자유주의와 동구권의 붕괴를 거치면서 이탈리아 공산당은 사회민주주의로 성격을 완전히 바꿔 ‘좌파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한다. 그리고 2007년 이탈리아 자본주의 새로운 상징이 된 언론재벌 출신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재집권을 막기 위해서라는 명분 아래, 기민당에서 갈라져 나온 중도우파와 통합해 민주당이 되었다.

혁신 그 자체보다, 혁신의 방향과 내용이 중요

베를링구에르와 아멘돌라의 이야기는 진보 정당에게 강력한 교훈을 던져준다.

그것은 바로 혁신 그룹의 존재가 정당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이다. 당의 비전을 제시하는 혁신 그룹은 정당이 과거에 안주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다. 베를링구에르와 아멘돌라의 그룹은 각각 다른 방식이었지만, 모두 당을 구하려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들의 존재 자체가 당이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 했던 살아 있는 증거이다.

하지만 혁신 그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혁신의 방향과 내용이다. 베를링구에르의 ‘역사적 타협’은 집권을 목표로 당의 혁신을 제시했지만, 과정에서 진보정당이 정치세력화 해온 노동자, 여성 등의 투쟁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게 되고 그들로부터 외면당한다. 보수정당과의 연정을 하더라도 진보정당의 본성을 잃지 않는 방향과 내용이 필요하다.

혁신 그룹은 정당 내에서 건전한 긴장 관계를 형성한다. 이들의 논쟁과 경쟁은 정당의 다양한 변화 가능성을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서로를 설득시키지 못하는 혁신안은 반대로 당내 분열을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혁신의 방향과 내용에 대한 치열한 토론을 통해 합의의 과정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이탈리아 공산당의 가장 큰 비극은 두 혁신가가 맞선 것이 자체가 아니라, 혁신의 방향과 내용이 진보정당의 본성을 잃지 않으면서 혁신그룹이 서로를 설득하는 역량의 부족이었다. . 베를링구에르와 아멘돌라의 이야기는 진보정당의 발전을 위해서는 혁신그룹의 비전 내용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며, 혁신그룹의 건강한 경쟁이 정당의 발전으로 이어지게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