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두고 폭발한 반세계화 운동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두고 폭발한 반세계화 운동


글: 표재선


1999년은 새로운 세기를 목전에 두고 여러 가지 우려와 기대가 뒤섞인 해였다. 사람들은 밀레니엄 버그부터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까지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했었다. 그런데 세상을 진짜로 망치고 있는 것은 따로 있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1999년 11월에 미국 시애틀로 몰려가 세계무역기구(WTO) 제3차 각료회의 개막식을 무산시켜 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했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Another world is possible)”

사진출처:SOCIALIST PROJETCT 홈페이지 갈무리

발화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반대하며 봉기한 멕시코 사파티스타의 투쟁과 1995년 우파 정권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선 프랑스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은 1999년 시애틀 투쟁이 있기 전에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각국의 노동자, 민중의 투쟁으로 전개되던 반세계화 투쟁이 국제적 연대행동으로 등장한 계기는, 1997∼1998년 활발하게 진행된 다자간투자협정(MAI) 반대 투쟁과 '쥬빌리(Jubilee) 2000'을 중심으로 한 제3세계 외채탕감운동이었다.

다자간투자협정(MAI)은 1995년부터 1998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간에 비밀리에 협상된 초안 협정이다. 각국 시민·사회단체 및 노동조합은 다자간투자협정이 1) 투자자의 권리를 정부·지역사회·시민·노동자 그리고 환경의 권리보다 훨씬 우위에 놓고 있으며, 2) 해외투자자에 대한 민중들의 민주적 통제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고, 3) 해외투자자가 국가를 상대로 제소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민주주의와 국가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 등의 문제점을 제기하며, 강력히 저항하였다. "MAI에 대한 NGO 공동 성명서"가 1998년 2월 인터넷을 통해 유포되었고, 여기에 약 68개국 565개 단체들이 서명했을 정도로, 그 저항은 광범위하고 강력했다. 결국 초국적자본과 제국주의 국가들은 1998년 10월 공식적으로 '협상의 중단'을 선언해야만 했다.

한편 제3세계 외채탕감운동은 영국에 기반을 둔 '쥬빌리(Jubilee) 2000'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외채탕감운동은 "희년(Jubilee)에는 너희들 가운데 가난한 자는 없을 지어다."라는 성경 구절로부터 최초 아이디어를 얻었으나, 그 근저에는 제3세계 '발전'과 '빈곤' 문제는 '외채' 문제의 해결이 필수적이라는 인식 속에서 출발했다. 외채탕감운동은 1998년 11월 17일 로마에서, 38개국 쥬빌리2000 단체들과 12개 국제조직이 모여, 상환불가능한 외채, 실질적으로 이미 상환한 외채, 부적절하게 기획된 정책과 프로젝트로 인한 외채, 부정한 외채와 독재정권에 의해 발생한 외채를 2000년까지 탕감할 것을 요구하는 '쥬빌리2000 캠페인'을 발족시키면서 본격화된다. '쥬빌리2000'은 1998년 영국과 1999년 독일에서 열린 G7+1 정상회담 때 수만의 시위대를 동원하여 제3세계 외채탕감에 대한 부유한 국가들의 결단을 촉구했다. 이러한 시위는 1999년 G7+1 정상회담에서 '중채무빈국(HIPC) 외채탕감 계획'이 채택되는데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위의 두 가지 투쟁 사례는 '반세계화 투쟁'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즉, '반세계화 국제연대 투쟁'을 '추상의 영역'에서 '현실 투쟁의 영역'으로 만드는 계기였으며, 가시적인 투쟁 성과물을 쟁취함으로써, 각국 민중들에게 금융 세계화에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과 '세계화는 필연적이며 불가피하다'는 이데올로기적 강요를 극복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주었다. 이러한 국제적인 연대행동이 1999년 시애틀로, 2000년 IMF와 세계은행 반대 투쟁으로 이어졌다.

폭발

1999년 11월 30일 시애틀에서의 WTO 반대 행동은 1999년 초부터 체계적으로 준비되었다. 다자간투자협정(MAI) 반대 투쟁 때와 비슷하게, 이번에는 '모라토리엄(Moratorium) 선언문'이 인터넷을 통해 배포되었다. 이 선언문은 "자유무역체제가 민주주의·인권·노동권·환경·문화 등 인류 삶에 미친 영향에 대한 포괄적이고 충분한 조사·평가가 선행되기 전까지는 뉴라운드 출범이 유보(Moratorium)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담고 있었다. 즉, '더 많은 자유화·개방화'를 위한 어떠한 추가적인 자유무역 및 투자 협상도 거부하며, 이것의 연장선에서 "어떤 새로운 이슈가 WTO에 편입됨으로써, 그것의 영향력과 권한이 확대되는 것"에도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 호소문에 전 세계 80개국, 1300여 개 이상의 사회운동단체들이 동참했다.

1999년 11월 30일 시애틀에서 열인 WTO 시위 출처: 위키백과

작전명 ‘N30’. 11월 30일 화요일 아침, 수백 명의 활동가가 WTO 각료회의가 열릴 컨벤션센터 근처의 주요 교차로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 후 몇 시간 동안 미국 노동자, 프랑스 농민, 한국 인권운동가, 인도 학생, 환경운동가, 페미니스트, 종교인, 성소수자 등 인종도 국적도 소속도 제각각인 5만여 명이 컨벤션센터 앞으로 모여들었다. 이에 당황한 미국 정부는 시애틀 전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무장한 경찰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연행하거나 최루액과 최류탄을 난사하였다. 하지만 시위대는 서로의 몸을 쇠사슬로 묶고 교차로를 봉쇄하며 맞섰다. 결국 이날 정오로 예정되었던 개막식은 취소되었다.

정부는 시애틀을 시위금지구역으로 지정하고, 통금시간을 정하는 등 시위대를 해산시키려고 했지만 다음 날에도 투쟁은 계속되었다.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수백 명이 연행되었다. 12월 2일에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시애틀 경찰서 앞에서 체포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결국, 12월 3일 WTO 각국 대표단들은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회의 종료를 선언하였다.

재점화

1999년 시애틀 투쟁 이후 반세계화 투쟁은 2000년에도 이어졌다. 1월에는 세계경제포럼(WEF)에 맞선 다보스행동이 있었고, 4월엔 IMF, 세계은행 연차총회에 맞선 워싱턴행동이 이어졌다. 그리고 9IMF, 세계은행 연차총회에 맞선 프라하행동 등이 있었다. 또한, 2003년 이라크전쟁 때는 반전운동으로 국제연대 행동이 이어졌다.

시애틀 투쟁 이후 저항의 세계화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지만 2001911일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 선포되고, 반세계화 운동도 탄압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전 세계로 뻗어 나가 세계 곳곳을 수탈하였다. 또한, 기후위기를 야기시켜 인류의 생존마저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착취와 억압에 맞서는 민중들의 투쟁 또한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러나 민중들의 투쟁과 달리 진보정당과 운동세력의 국제연대운동은 약화되었다.

그런데 25년이 지난 올해 대한민국 경주에서 반자본주의 국제연대 행동이 재점화 되었다. 국내외 38개 단체로 구성된 APEC반대 국제민중행동 조직위원회가 1029일부터 APEC 반대, 트럼프 반대를 외치며 투쟁에 나선 것이다.이들은 조직위원회를 해소하지 않고 2026120일 트럼프 취임 1주년에 맞추어 전세계 연대투쟁을 이어가기로 했다.

<자세한 내용 보기 : 경주에서 2025 APEC반대! 트럼프 반대! 민중 모두의 경제!를 외치다.>

https://anotherplan2025.blogspot.com/2025/11/2025-apec.html

자본의 세계적 착취와 수탈, 그리고 이에 맞선 전 세계 민중의 저항은 계속될 것이다.시애틀 투쟁은 반세계화 운동은 지구촌 시민사회의 강력한 국제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중요한 사례이다. 저항의 세계화를 통하여 초국적 자본의 이해를 저지할 수 있다는 사례를 남김으로서 우리에게는 일국의 차원을 넘어서는 지구적 차원에서, 다양한 계층, 계급과 이슈들이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연대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주고 있다.